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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명신 강순
구분 역사인물
내용 조정(朝廷)을 지키며 나라위해 산 명신(名臣) 강순(康純)

이조(李朝) 세조(世祖)때 함경도(咸鏡道)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있었다. 우리나라 북방에서 세조(世祖)에 대한 반심이 풀리지않고 기회있는대로 한번 일어나 자기들 마음대로 야인과 그 근처땅을 통치하고 싶어했다.

길주(吉州)사람으로서 회령부사(會寧府使)까지 지내다가 상을 당하고 집에 있을 때 길주목사(吉州牧使) 설징신(薛澄新)과 절도사 강효문(康孝文)등이 새로 부임하여 새로운 정치를 한다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 가운데서도 호패법을 실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토지를 강탈하니 은연중 토후(土侯)를 괴롭히는데 반감을산 이시애(李施愛)가 주동이되고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라고 한다.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조석문(曹錫文)과 어유소(魚有沼) 남이(南夷) 허종(許琮) 강순(康純)등 28명의 대장을 예속시키며 십만의 군사로 난을 진압시키러 북쪽으로 행하였다.

강순(康純)은 북쪽 토후(土侯)들이 일으킨 난이라 다소 희생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도총사(都摠使)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과 함께 큰 길을 따라 진격했다.

세조(世祖)의 동생(임영대군)의 아들인 도총사(都摠使) 龜城君)은 당시 나이가 18세인 젊은이었다. 강순(康純)은 도총사(都摠使) 구성군(龜城君)이 말하기를 무인은 정사에 나서지 않는게 좋다고 한유에게 말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부신의 목숨은 기둥과 같으나 그 기둥은 나라를 지키는 기둥입니다. 무인의 목숨은 자기의 것도 아니고 가족의 것도 아니며 더구나 씨족의 것은 더욱 아니며 오직 나라만이 소유한 목숨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시애(李施愛)의 반도들과 싸움은 북청의 마기령(麻記嶺)에서 크게 벌어졌다. 강순(康純)은 적을 단숨에 무찌를 각오로 군사들 앞에서 적중으로 쳐들어갔다. 반도들은 처음 완강하게 덤벼들었으나 이쪽의 공략에 휘말리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도총사(都摠使) 구성군(龜城君)이 싸뭉에 분전하는 강순(康純)을 보고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다가 전사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말하자「조금전에 말씀드린대로 입니다.」하고 다시 적을 무찌르러 뛰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이조초엽 용맹한 무인이었다.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병마절도사 강진행(康鎭行)의 아들로 남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는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로 소문났었고 덕이 있고 마음씨가 정직해서 음사로 무관에 등용되어 1450년 문종(文宗)때에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에 올랐으며 단종(端宗) 1년(1453)엔 회령부사(會寧府使)를 거쳐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내게 된다.

그 다음해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선 1460년엔 판녕북진도호부사(判寧北鎭都護府事)가되어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참가하여 높은 공으로 종성절제사(鐘城節制使)가 되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혁혁한 공을세운 그는 조정에서도 잊을 수 없는 무신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용맹성에 많은 화재를 남겼다. 세종(世宗)때 김종서(金宗瑞)가 야인을 토벌하여 두만강(豆滿江)밖으로 똔느 압록강(鴨綠江)밖으로 야인을 몰아냈으나 야인들은 때때로 국경을 넘어서 침범하여 우리나라로 쳐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북쪽에의 난을 정벌하는데 따라서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고자 그에게 명이 떨어지니 그는 길주(吉州)에서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와 함께 두만강(豆滿江)을 건너서 쳐들어가선 야인의 영주격인 이만주(李滿住)와 그 아들을 죽이며 본거지를 분쇄하고 돌아와선 1468년엔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는 무인으로서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라선후 조정의 여러 명문의 후예들과 사귀기에 애썼으며 특히 태종(太宗) 외가에서 맥을 잇는 남이(南怡)가 연령면에서 그 아래였으나 젊은 그들을 아꼈으며 그래서 출세에 어두운 남이(南怡)의 부하 유자광(柳子光)이 자기 출세를 위해 남이(南怡)를 모함해서 죽이게 될 때 따라서 무고로 사형을 당한 억울한 무인이었다.

무인의 목숨은 나라만이 가질수 있다는 평상시의 생각대로 80이넘어서 사형대에 오를때도 나라의 왕의 명령에 순복하여 옷을벗고 죽어갈 때 그 죽음의 숭고함에 모두 탄복하였다 한다.

일생동안을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뛰어다닌 그가 끝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세조(世祖)의 조카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말한데로 무인은 정사에 임하지 않는게 좋다는 말을 되새겼다 한다.

그가 노년에 역적으로 몰리어 억울하게 죽었으나 그 후에 그의 선명함이 알려지게되어 충신으로 받들게 되었다. 일생을 나라위해 산 용맹한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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